최초의 대법관
카에타노 아렐라노가 2세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가 5세가 되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마닐라의 수도사에게 맡기고는 떠났다. 콜레지오 데 산 주안 데 레트란의 일꾼이던 그는 수도사들의 심부름 등을 했다. 어느 누구도 심부름하는 소년이 이후에 대법원의 대법관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환경이 더 나아진 때는 마닐라 비논도 교구담당 수도사가 그를 자신의 산하에 두었을 당시부터였다. 비논도 교구담당 수도사는 아렐라노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며 그가 매우 명석하며 성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렐라노가 15세가 되었을 때 그는 UST에서 철학과정을 마쳤다.
1876년, 그는 법학과정을 이수했다. 아렐라노는 변호사로 놀라운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인들과 다른 변호사들이 그의 자문을 얻기 위해 찾아오곤 했다. 그는 스페인 지배의 말기경 입법의회 자문의로 활동했다. 3개월간 그는 에밀리오 아귀날도의 혁명정부산하 외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아렐라노는 식민정부에서 중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그는 시골정부들을 직접 방문, 조직정비를 하는데 윌리암 H. 타프트의 도움으로 미국인들이 지방 정부조직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도왔다. 그는 또한 필리핀을 미국의 연방정부로 소속시키기를 원하던 연방정당의 소속원들 중 뛰어난 역량을 과시했다. 아렐라노에게 주어졌던 커다란 기회는 미국인들이 필리핀의 대법원을 설치하면서 그들이 아렐라노에게 제의했던 임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1899년 그는 새롭게 설치된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렐라노는 대법관으로 20년 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