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라우렐은 1891년 3월 9일 바탕가스 타나우안에서 소테로 라우렐과 자코바 가르시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라우렐이라는 이름은 정치계에 있어서는 아주 저명한 이름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인 소테로 라우렐은 능력있는 변호사였으며 아귀날도 정부하에서 장관을 지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말로로스 국회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호세 라우렐은 타나우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06년 마닐라로 이사가 마닐라 고등학교(현재의 아라울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라우렐은 1911년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라우렐은 18세 때 평생 잊지 못할 악몽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의 운명을 180도 바꾸어 놓을 뻔한 일이었다. 라우렐은 당시 한 여인을 놓고 경쟁상대에 있던 한 사내를 불가피하게 칼로 찔러 살해했던 것이다. 라우렐이 어느 날 집으로 향하던 길에 그 사내가 갑자기 나타나 라우렐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이에 놀란 라우렐은 그 사내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그 사내는 그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라우렐은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라우렐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곧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며 고등법원에서는 그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1911년 라우렐은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 UP에 입학했다. 그때 라우렐은 이미 파시엔시아 히달고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라우렐은 그의 결혼 생활에서 모두 9명의 아이를 낳았다.
라우렐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공부를 했다.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1915년에 UP을 졸업한 후 라우렐은 곧 정부를 위해 일했다. 그의 탁월한 업무 수행능력을 인정한 정부는 라우렐을 미국에 있는 예일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1920년 라우렐은 학업을 마치고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라우렐은 그후 정부의 요직을 맡았으며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라우렐은 1923년 내무부장관직을 사임하고 정치가로서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
그후 그는 변호사로서의 자기 일에 충실하며 연륜을 쌓아갔다. 그리고 다시 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그는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라우렐은 그후 1931년까지 상원의 다수당 지도자로 임무를 다했다.
그러나 1931년 선거에서 재당선을 노리던 라우렐은 역시 저명한 변호사인 클라로 렉토 후보에게 패했다.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자체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을 때 라우렐에게 다시 정치가로서의 기회가 주어졌다. 1934년 라우렐은 헌법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헌법을 제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커먼웰스 정부가 수립된 후 라우렐은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된다. 이는 라우렐에게 중대한 성공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라우렐은 마누엘 퀘죤 대통령에 의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다. 2차대전 발발 후 퀘죤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은 필리핀에 우선 군사정부를 세운 뒤 1942년에는 필리핀 독립을 선언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1943년 9월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헌법에 따라 1943년 10월 14일에는 필리핀 제 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라우렐이 이를 이끌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라우렐은 일본의 압박 속에서 정부를 운영하며 비록 자유로운 행정권은 없었지만 필리핀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참아줄 것을 요청하며 격려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한 후 필리핀 땅에서 물러났을 때 라우렐은 일본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된다. 변호사였던 그는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1946년 마누엘 로하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라우렐은 사면되었고 다시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라우렐은 1959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그의 고향인 타나우안 박물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