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유럽사회의 필리핀 진출 이전, 그 세력을 필리핀 제도의 대부분으로 확장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 통치 시대기간동안 남부의 술루 제도, 민다나오섬의 일부에서 세력을 유지해 오고 있었지만, 1915년 술루 왕국이 미국과 협정을 연결해 그 지배하에 들어간다.
60년대 필리핀 전역을 주름잡았던 반미 내셔널리즘이나 좌익 운동은, 이슬람교도의 정치 운동에 새로운 전개를 일으키게 했다.
CPP가 결성된 같은 해인 1968년, 크리스트교도의 이주에 의한 대립 격화에 방아쇠를 당긴 사건인 민다나오 코타바트내에서 활동중이던 민다나오 독립운동(MIM)이 독립을 선언, 이슬람교도의 분리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970년도 눌 미스와리등을 중심으로 모로 민족 해방 전선(MNLF)이 결성됨과 동시에 무장 조직인 반사모로군(BMA)이 결성된다.
마르코스의 계엄령 후, 무장해제 명령을 시점으로, 이슬람 제국의 지원을 받는 MNLF가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된 국지적인 반란부터 대규모 전투로 까지 확장세를 거듭해 민다나오 지역등은 냉전 상태가 된다.
리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외상회의가 필리핀 정부를 비난, 국제 문제가 되면서 1975년경 마르코스 대통령은 완전 자치를 약속, 76년 정부는 MNLF와 정전협정을 트이폴리에서 맺었다.
그러나 남부 13주에서의 자치구 설립에 관한 주민 투표를 둘러싸며 대립하개 되자 MNLF가 투표를 보이콧, 독립을 위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또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MILF)이 새롭게 결성되는 등, 분열, 내부 항쟁이 표면화 되기 시작했다.
아키노 정권이 적극적으로 실시했던 회유책은 일정한 성과를 올리지만 이슬람측의 독립을 향한 여러가지 전쟁과 테러행각은 식어들 줄 몰랐다.
2월 혁명 후의 신헌법에서는 이슬람교도 지역의 자치권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으며 거기에 따라서 1989년에 민다나오 이슬람교도 지역 자치 기본법이 성립, 민다나오 13주 9개 시에서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지만 승인된 것은 4개주에 그쳐 MNLF는 트리폴리 협정에 따른 완전 자치가 아니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슬람 제국 회의가 자치법을 지지한 것에 의해 MNLF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정부와의 평화교섭을 목표로 했지만 정부가 이를 거부가고 나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라모스 정권이 출범하자 MNLF의 미스와리 의장은 정부와 조건부인 평화교섭 제안을 받고 MILF도 교섭을 수락했다. 다음 1993년에는 MNLF와의 본격 교섭이 시작되어, 잠정 휴전 협정이 연결되었다. 그러나, MILF나 MNLF 개혁파와의 교섭은 시작되지 않고, 로스트 커멘드나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의 ‘아브 사얍 그룹’ 등은 테러 활동을 활성화 시키며 미스와리가 주도한 평화교섭에 반발한다.
평화교섭은 이슬람 주둔지역의 자치문제를 둘러싸고 평행선을 더듬지만, 96년도 나타난 자치 문제에 대해서는 이슬람 민다나오 자치구(ARMM)의 지사인 미스와리 의장을 여당 후보로 임명하는데 합의, 4차례에 걸친 주요 교섭을 통해 MNLF 멤버의 경찰, 국군 편입 문제로 최종 합의, 평화협정이 성립 되었다.
3년간의 잠정 기구인 남부 필리핀 평화 개발 평의회(SPCPD) 위원장으로는 ARMM의 지사로 당선된 미스와리가 취임함과 동시에 일본과 미국 등의 원조에 의한 개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MILF는 이슬람 국가의 독립을 요구, 개발 프로젝트를 종종 공격함에 따라 평화교섭은 진전되지 않고, 정부군과 이들은 정전과 교전을 반복한다.
에스트라다 정권이 되자 정부는 반정부 세력에 대해 강경 자세로 전환, MILF에 대해서는 대규모 공격을 실시해 최대 거점인 캠프 아부바칼을 공략한다. 한편, 아브사얍은 외국인을 인질로 취하는 한편 살해행각을 자행해 국제적인 문제로 두각되었다.
아로요 정권은 전 정권의 방침을 전환해, MILF와의 잠정 정전협정에 합의. 산발적인 전투가 반복되는 동안에도 평화 합의를 향한 교섭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필리핀 뿐 아니라 말레이시아까지 진출해 인질극을 벌이는 아브사얍에 대해서는 괴멸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