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필리피노]혁명극작가 오렐리오 톨렌티노 (1867년 10월 13일-1915년 7월 5일)
오렐리오 톨렌티노는 1898년 필리핀 혁명의 베테랑이다. 더 정확하게는 보니파쇼나 아기날도와 같은 카티푸너로이다. 그는 미국 식민기간 동안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필리피노의 열망을 그린 극본을 즐겨 써 더욱 유명해 졌다. 레오나르도 톨렌티노와 페트로나 발렌주엘라는 교양있는 팜팡가 출신으로 그들의 자녀 오렐리오와 자신토에게 줄 유산으로 교육을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했다.
5세가 되자 오렐리오는 가정교사에게 교습을 받았다. 불라칸의 에스쿠엘라 데 라티니다드에서 라틴을 전공하는 동시에 산토 토마스에서 철학과 법도 공부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팜팡가의 산토 크리스토로 돌아와 교직을 이어받아야 했다. 5년후 그는 톤도로가 법정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보니파쇼를 만나게 된 때도 이 때이다. 필리핀 혁명이 발발하자 28세의 톨렌티노는 스페인 관료에게 체포되었다.
손과 발에 족쇄가 채워지고 전기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그는 꼿꼿하게 서서 카티푸난을 배반하지 않았다. 톨렌티노는 9개월후에 풀려났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으로도 그의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카티푸난으로 돌아온 그는 극본과 전단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미국 식민기에도 카티푸난은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오렐리오의 전투도 치열했다. 펜과 무기로 그는 그의 요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의 유명한 극본 "카바폰 나욘 앗 부카스" 때문에 그는 2번째로 체포당했다. 그 극본은 마닐라 산타 크루즈의 리버타드 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제각기 다른 국가에게 지배당한 필리핀의 역사를 잘 보여주었고 필리핀이 독립을 위해 일어설 것을 경고했다. 이 극의 마지막 부분은 미국기를 내리고 카티푸난기를 날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 공연의 성공담은 미국 행정부에 즉시 전해졌고 공연 두 번째 날에는 술취한 미군 20명이 공연장을 덮쳤다. 톨렌티노가 미국기를 짓밟자 공연장은 일대 아수라장으로 변해 연기자들은 몰매를 맞았다.
톨렌티노는 그의 형제 자신토와 12명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끌려갔다. 톨렌티노는 처음 종신형을 받았으나 나중에 8년으로 줄었다가 윌리암 카메론 포베즈에 의해 방면되었다. 한편 그의 가족들은 그가 복역하는 동안 유명세를 치러야만 했다. 톨렌티노는 일생동안 자유와 억압당한 필리피노를 대신하는 극작가로서 활동했다. 그의 유명한 극은 ‘앙 바공 크리스토', ‘루방 타갈로그'이다. 그는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오늘날까지 필리핀의 영웅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