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국민들의 영웅이며 우상이다. 그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영위했으며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는 필리핀의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뛰어난 개인적 능력을 가진 것과는 달리 그저 보통사람이라고 불릴만큼 평범했다. 라몬 막사이사이는 1907년 8월 31일, 잠발레스에서 태어났다. 막사이사이는 잠발레스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 그는 UP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곧 호세 리잘 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상업학을 전공했다. 1932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트라이트란사라는 운송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회사의 매니저로 승진하지만 곧 회사는 파산위기를 맞게된다. 이때 막사이사이는 이러한 위기를 잘 수습해 회사를 구해내고 루스 반손이라는 여인과 결혼해 4남매를 낳았다.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했을 때 막사이사이는 자진해서 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그의 리더쉽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비록 일본군에게 패했지만 “막사이사이 게릴라부대”는 많은 공헌을 세웠다. 1946년 막사이사이는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는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1949년 재당선된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그의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퀴리노 대통령이 그를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한다. 당시 정국은 공산 게릴라 단체인 후크단으로 시끄러웠으나 국방부 장관인 막사이사이 장관은 후크단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부조리로 가득한 군을 정화하고 부패한 군인처벌 및 정직과 헌신으로 나라에 봉사하는 군인들에게는 철저한 보상을 했다. 막사이사이는 그의 게릴라를 이끌던 경험을 토대로 후크단에 대한 효과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해 수많은 후크 단원들이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후크단 문제가 잠잠해지자 막사이사이는 사회문제에 눈을 돌려 후크단 정벌로 이름이 알려진 그는 내쇼널 리스타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했고 1953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퀴리노와 경합을 벌여 당선되었으며 부통령으로는 가르시아가 당선되었다.
후크단 토벌로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 알려져 있던 이름으로 그 유명세의 힘을입어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는 당선된 후 말라카냥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그래서 서민들은 말라카냥궁을 찾아가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었으며 대통령 임기 중 그의 가족 및 측근들에게 어떠한 혜택도 부여하지 않았으며 도로, 다리 및 건물등이 자신의 이름을 따라 호명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필리핀에 민주화를 토착화 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공산주의 단체 섬멸과 민주주의 보전이라는 큰 성과로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되었다. 막사이사이의 정책은 또한 서민과 빈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빈민가의 주민들은 그를 “진정한 사나이”라 부르며 감사했다. 그의 빈민구제사업 중 하나는 바랑가이의 환경을 개선하고 빈민가 및 낙후한 지방에 공동우물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이용하게 하여 아직도 그 우믈들은 막사이사이 우물이라 불리운다.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1957년 3월 15일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지고 부통령 가르시아가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승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