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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E. Marcos, 1917~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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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코리아포스… 댓글 1건 조회 2,851회 작성일 11-03-2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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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디난드 마르코스 (Ferdinand E. Marcos, 1917~1989)

<지난호에 이어…>
  그의 당 외에 다른 정당은 이 선거에서 모두 배척되었으나 유일하게 다른 당에서 출마한 사람은 당시 감옥에 있던 베니그노 아퀴노가 자유당 소속으로 상위의원에 출마한 것이었다.
 마르코스가 속한 정당이 승리한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었던것은 다른 정당에 주어진 표를 사기극을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변조했기 때문이다.  1978년 6월 12일, 국회법 기간 중 마르코스에게 의회정부를 도입할 것이 건의되었으며 그로 인해 수상이자 대통령인 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  1981년 1월 17일, 마르코스는 대통령 제 2045조를 통해 8년 4개월간 지속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계엄령이 해제된 후 1981년 6월 30일, 필리핀에선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국가적 문제였던 독점과 부패, 공산주의자들 간의분쟁, 테러리스트와 국가 경제문제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 복합적으로 미 군부대에 대한 테러가 급증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미국 정부는 마르코스에게 필리핀 군인들의 도덕성을 향상시킬 뿐더러 국민들이 가장 대통령으로서 신임하고 선출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기 위해 거짓 없는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을 촉구했다. 

 1983년 8월 21일,  베니그노(니노이) 아퀴노 Jr. 는 그의 살해를 우려한 많은 주위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받쳐 필리핀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미국에 귀국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필리핀 국제공항에서 공항 안전요원의 명령 아래 살해되었는데, 살해범은 롤란도 갈만으로 알려졌다.  다른 이들은 롤란도 갈만은 니노이가 사망하기 전에 먼저 살해되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죽음은 법과는 관계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인정했다. 

 시민들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많은 이들은 몸에 노란 리본을 두르고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의 니노이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며 마르코스 정권의 마감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자 외국 투자가들은 필리핀에 대한 투자를 보류하였고 이 무렵 있을 예정이던 미국 대통령의 방문 또한 연기되었다.  니노이 아퀴노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실시 되었으나 당시 처한 국면으로 볼 때 정확한 결과는 기대될 수 없었다. 

 이 수사는 코라존 줄리아노 아그라바, 아마도 디아존, 루시아노 살라잘, 단테 산토스와 엘네스토 헤레라로 구성된  AGRAVA에 의해 실시되었다.  
 AGRAVA 의 조사기록을 보면 1984년 10월 23일, 자행된 니노이 아퀴노의 살해는 군에 의한 것이었으며 군인이 아퀴노를 사살하였으며 정부가 발표했던 갈만씨가 사살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록은 모든 AGRAVA의원에 의해 서명되었고 파비안 벌 장군, 쿠에바스 장군, 쿠스토디오 장군을 포함한 26인의 군인들이 살해자로 판명되었다.  마르코스는 AGRAVA로부터 이 보고를 받았고 죄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나 무죄로 기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잃었다.  국민들은 새 정권을 통해 인권이 존중되기를 무엇보다 원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 무렵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를 공포했다.  1986년 2월 7일 실시된 선거에는 니노이 아퀴노의 아내 코라존 C. 아퀴노가 출마하여 마르코스와 대결을 벌였다. 

 공정선거를 위한 국민활동기구(NAMFREL)가 선거를 감시하도록 허용되었으나 선관위의 발표는 마르코스의 재당선이었다.  코라존 아퀴노는 NAMFREL의 집계결과 당시에는 그녀가 승리한 것이었음을 주장했다.  그녀는 필리핀 국민들에게 정부 은행과 몇가지 정부 생산물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했다.  무엇보다 큰 사건은 1986년 2월 22일에서 25일 사이 주안 폰스 엔릴 국방부 장관과 피델 라모스 국방부 보좌관 라모스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마르코스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번 선거는 코라존 아퀴노가 승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르코스에게 대통령직 사임을 요청하며 전 국민에게 동참할것을 촉구했다.   마닐라 추기경 칼디날 신 또한 이 기간 동안 대규모집회를 통해 필리핀 국민들에게 엔릴과 라모스의 지지를 호소했다.  니노이 아퀴노의 형제 버츠 아퀴노는 EDSA에 위치한 모든 군인 캠프들을 저지하는 것을 맡았다.  몇 천의 시민들이 EDSA에 직업과 나이, 종교에 관계없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캠프 아귀날도와 캠프 크라임 주변에서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탱크들과 군인들에 묵주, 장미꽃, 담배, 기도로 맞섰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EDSA 혁명 아래 패배했고 EDSA 혁명을 통해 보인 시민의 역량은 정부의 모든 군인들과 탱크들을 이겼다.  코라존 아퀴노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도이 라우렐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2월 25일, 마르코스 일가와 벌 장관은 말라카냥을 물러나 U.A.(United Airlines) 를 통해 괌을 거쳐 하와이로 갔으며 마르코스 일가는 1989년 9월 28일, 마르코스 사망 때까지 하와이의 와이키키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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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마니님의 댓글

산가마니 작성일

유익한 정보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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